소리풍경의 쾌락을 넘어서 실재의 소리로, 이대일 작가


지난 해 8월 10일 경기창작센터 오픈스튜디오 개막 때 발표된 이대일 작가의 <소리에 이르다>는 사운드아트 퍼포먼스로 인지되었다. 최근 국내외 사운드아트는 소위 ‘귀틔움’이라는
‘적극적 듣기’의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 20세기 초의 미래주의가 제대로 관통하여 노이즈의 음악사적 편입이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으나, 그럴수록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음악은 19세기 음악이다”라는 역설적 명제가 득세하는 시간이었다. 노이즈는 정보화 시대에 도달하면서 처치 곤란할 정도로 과잉 범람하였다. 그러므로 현재의 ‘적극적 듣기’는 기존 청각적 액션의 재강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과잉으로 인한 카오스 상태인데도 그 결을 거스르고 듣기의 방식만 강조한다는 것이 일리는 있지만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는 것이다.
이대일 작가의 <소리에 이르다>가 인지되는 사운드아트의 감각은 지배적인 음악적 질서를 부르주아의 향수 차원으로 무시하고 이 우주의 사운드로 참여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 차원이었다. 세 명의 시작장애 아동들이 등장하여 각자가 현악기와 타악기를 배우지 않은 채 자유롭게 연주해 주었는데 실재적 관점에서 보면 ‘세 명의 존 케이지가 등장하여 실제로 연주하는 공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존 케이지는 음악의 서구적 질서를 깨버리고 음의 세계로 나가는 문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리로 나가면 누구나 실재의 음을 누리는 퍼포머가, 사운드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급진적 명제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이론으로서는 진부하나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신선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음악이나 춤, 퍼포먼스 같은 공연예술에서는 너무나 타당한 명제이다. 왜 아무도 존 케이지처럼 하지 않으면서 존 케이지를 암송하는가. 이대일 작가는 존 케이지가 권유한 대로 그 음악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운드의 세계를 적극 향수하고 놀이했던 백남준과 같은 차원을 이해하고 있다. 왜 음악인가? 이는 이것이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구도 ‘음악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을 때 어떻게 내가 ‘음악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대일 작가는 존 케이지 주제의, 그러나 존 케이지를 뛰어 넘어서 - 그는 자신이 실연하거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를 실연시켰다 - 즉각적으로 그 경지를 취득했다. 세 명의 시각장애 아동들이 바로 “세 명의 존 케이지가 되어” 연주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존 케이지가 말한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즉 이것이 악기라는 생각도, 내가 연주자라는 생각도 없이 무연한 연주를 했다는 것이다. 평상심만 갖는다면 누구나 존 케이지가 될 수 있으며 그를 뛰어넘는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연주자는 작곡과 연주와 향수자를 한 몸에 아우르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의 세계이다.
이러한 사운드 퍼포먼스는 2012년 12월 28일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의 한 작품으로 발표된 <소리에 이르다> 공연에서도 두드러졌다. 박수를 쳐야만 19분의 시간이 흘렀음을 시각장애 아동들이 알 수 있다는 전제는 연주하는 동안 완전한 몰입이 아니라 그 음이 흐르는 시간을 계속적으로 인지해야 함을 조건화 하고 있었다. 즉 소리를 듣는 것은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다. 즉 소리를 듣는 것은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두 개의 트랙 속에서 ‘낯설게 하기’의 지연이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음들의 배열, “It rains."의 문장에 속하는 비인칭의 빗소리 같은 연주, 그리고 그 우연한 음들이 마치 어느 순간 낯설지만 완전히 만나듯이 소리와 소리가 접합되듯이 맥놀이(beat)로 증폭되는 연주를 접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덩달아 얻게 되는 것이다. 구상적이지 않은 섬광같은 음의 창조가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이대일 작가의 사운드 비전은 이미 “우리 현존재의 정처인 우리 우주는 남김없이 음악, 음, 소리로 화해간다는 사실“(백남준)과 같은 영역에 이르러 있었다.
비평가 김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