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곡동의‘나무와 공원’을 형상화한 이대일 작품에 부쳐

시각예술에서는 예술행위로 규정되는 제작행위의 자발성과 타당성이 항상 그 자체로 문제
가 된다. 당연히 이 제작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작행위의 결과로서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예술가 즉, 예술행위의 적극적인 주체로서 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촉발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아마도 예술 그 자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이 이미 예술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걸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술 중 시각예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적극적인 주체로서 한 사람, 그의 행동과 그 동기, 행위결과로서 드러난 것들에 대해 근원적으로 무엇이 먼저 앞서 있었다는 조건만으로 이미 그러하게 설명되어지거나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조건 또한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으로부터 규명되어 있거나 규정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 예술가가 하늘에서 우리 앞에 떨어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음들을 정확하게 묻는 것이고, 늘 물어봐야 한다. 예술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술행위를 인정할 수 없으며 예술행위에 대한 동의 없이 우리는 어떤 것도 그것을 예술작품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과 관련한 영역에서는 동의하고 있는 일반인들은 거의 모두가 예술행위
에서 제작행위와 생산행위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작행위는 생산행위에 비해 감성적으로 단순하고, 손-몸을 사용하는 직접성을 가지며, 근원적인 장인정신에 직접 맞닿아 있다고 막연히 가름할 뿐이다. 그에 비해 생산행위는 보다 현대적 감성을 지닌 말로 받아들이며 어떤 맥락을 떠올릴 때 동의하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 예술 교양부분에 관해서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의 생산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왜 예술을 문제 삼을 때, 예술가의 제작행위와 생산행위가 구별되어야 하는가? 일반적인 사물은 제작되어질 뿐 생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모든 사물들은 제작방식의 개선을 통해 제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이제-비로소-생산되어진 그 것들’로 바뀐다. 이 점에 대해 현대 시각 예술가들은 경고하였고 한편으로 경배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앞선 현대예술가들은 중요한 물음제기 방식에서 하나를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두 가지 질문으로 구성된 제작과 생산의 상호의존적 의미항을 파악하지 못한 채 진행되었던 결과로 보인다. 예술가는 자신의 능동성으로부터 무엇에 대해 표현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어떤 물음을 간직하고서 스스로 그 유효함에 대하여 물음 안에 내재된 동기유발의 근거, 촉발됨의 계기, 동기유발 그 자체를 따져 묻는 행위를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이 때 작품으로 명명되는 것은 고스란히 이 물음의 융합된 형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예술가의 행위는 한 개인을 최종목적으로 두고 질문되어지는 구조와 행위 그 자체
가 목적이 되는 구조 두 가지로 나뉘어져 물음을 구성하며 이 종합을 일반행위와 구분하여 예술적 행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대일이라는 한 사람이 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행위의 결과로 남겨두게 된 염곡동의 ‘나무와 공원’ 프로젝트는 이제 이러한 바탕에서 구조적으로 분별되고 파악되며 최종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물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여느 마을 어귀에나 있었던 것처럼 이 나무는 한 마을을 하나의 의미로서 지켜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장소와 시간은 개발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에 의해 자신의 존재의미가 바뀌어 버렸다. 이제 한 사람이 이 시공간의 잃어버린 부분과 잊힌 부분 그리고 감추어진 부분과 감추는 부분에 대해 개입하고 있다. 이 개입이 정당한 것인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 편이 옳다. 이 개입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의미 가 재구성되거나 드러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의미가 드러나는 결과는 제작행위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자를, 거울을, 자동차를 제작할 때 의미를 드러내려는 목적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제작행위에서는, 비록 그것이 현대적 생산방식으로 불리는 혼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능적 적용과 그 목적에 따른 유효함이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똑같은 이 사물들이 누군가에 의해 일정한 용도 이상의 쓰임을 가지면서 의미가 생산된다. 여기서 의미가 제작된다고 표기하지 않는 오랜 언어습관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랜 언어습관은 예술로 귀결되는 모든 종합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오래된 나무에 개입하고 있는 한 사람은-이대일-자신의 개입을 통해 또 다른 시공간의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최종적인 것으로서 나무재료의 얽힘과 섥힘의 구조물이지만 이 구조물이 담아내는 것은 바로 생산된 의미인 것이다. 예술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 안에 자신이 바로-지금-여기서 개입한 결과로 생산된 의미를 밀어 넣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항상 새로운 것 안에 새로운 의미들을 밀어 넣음으로써 그들로부터 우리는 의미들이 하나의 관계로 구성되는 의미항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에서 제작과 생산 그리고 감상의 관계다. 의미들의 입체적인 구조성이 바로 의미항인데, 그렇다면 염곡동의 두 그루 나무와 작가 이대일이 맺은 새로운 관계로부터 파악 가능한 의미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쉽게 ‘공동체’, ‘이웃 간의 한가로운 정담’, ‘마을의 전설’ 등 이미 고정된 지시적 개념들을 끌어다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 발상은 애초에 작가의 개입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공공성의 사태를 드러내는데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공공성은 현재진행형으로서 미래를 끌어내 예감하는 것이지 지금-여기에 무엇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공공성의 행정적 제도와 예술의 공공성 지향은 여기서 아주 큰 일치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공공미술로 전회를 요청할 때 새로운 의미항의 구축이라는 맥락적 제안 조건을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의미항은 사람의 관
계를 드러내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며, 반드시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미래의 시간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어차피 이대일의 작품처럼 보이는, 그러나 이제 그것을 작품으로 불러야 할 지, 다른 개념어를 사용해야 할지조차 미술계에서는 한 치의 논의도 없는 관계로 ‘~으로 보이는’이라는 유보적 용어를 사용해야 할 지경인데, ‘나무와 공원’은 기존 미술이해의 틀로 보면 나무재료로 마감된 야외용 바닥 구조물일 뿐이다. 공공미술에 대한 오독으로 살펴보면 이대일의 그것은 만남과 화해, 정담과 한담, 나눔과 공동체 등으로 개념 파악 가능하나 실재하지 않는 공허한 잡담으로 바뀔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기 전에 어떻게 한
사람의 개입이 예술가의 개입으로 바뀌며 예술가의 행위가 제작을 넘어 의미를 드러내는 생산방식으로 ‘그 곳’에 연결되고 있는지 밝히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제 그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항으로 사람 관계를 하필이면 이대일에 제공한 ‘작품처럼 보이는 그 것’을 이용하는지 살펴야 한다. 예술가의 제작이 결과적으로 생산방식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그래서 작가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 내던져질 때이다. 예술가의 행위 자체가 문제 될 때, 물음이 정당해지는 것은 그 내 던짐이 항상 ‘우리’ 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행위는 그 근원에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었다. 오히려 제작행위로 간주되어진 도발의 역사로부터 개인적인 것으로 파편화 되어왔을 뿐이다. 염곡동에서 우리는 아직도 형해形骸처럼 속까지 타버린 예술행위를 만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낼 새로운 관계의 촉발을 만나게 되는가? 이대일은 분명한 어조로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관계 개입의 발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점은 공공미술이 공공성을 확정할 수 없다는 이 공공미술이 가진 무규정성의 특성에 장점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작품이 열려지는 가능성으로 방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점은 정확한 장소지정에서 항상 문제를 유발시키는, 논란의 가운데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자기규정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예술가의 개입이 새롭게 예술을 규정지으려 하는 새로운 관계 즉, 익명성 앞에서-안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대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자신의 예술행위가 제작행위에 치중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내세우는 오랜 관습적 태도의 문제이다. 이 오랜 언어적 관습으로부터 우리는 유의미한 개념적 도전을 놓치고 있으며, 그 결과 시공간에 대해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우리가 늘 예술가를 초인처럼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자 이 섭